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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의 방

 

1.

아마도 중학생 때쯤..? 이 마지막 이었던 것 같다. 주말에 방문한 마포중앙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했다. 영풍문고,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서점에 가면본능적으로 'BEST SELLER' 코너로 발길이 가게된다. 무수히 많은 책더미들을 지나 그곳에 가면 어디선가 한번 쯤 들어봤을, 어디선가 한번 쯤 보았을법한 책들이 순위에 맞추어 진열되어 있다. 나는 은연중에 인지하고 있었을 책 한권을 집어들어 계산대로 향할 거고 그게 나의 독서생활의 한계점 이었던 것 같다. 도서관은 서점과 다르게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기에 이 책이 베스트셀러 라고 알려주거나,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는 일말의조언도 없다. 그저 어떤 기준으로 책을 분류해 스스로 원할때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정도만 도와줄 뿐이다.어쩌면 요즘 시대의 책은 내용만큼이나 가의 유명도와 훌륭한 책 디자인, 구성 등이 중요한 시대인지도 모르겠다.필요에 의해서 찾게된 책이 아니라면 아마도 그 책은 우리의 책장 어딘가에서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는 일이 허다할 것이다.도서관은 그런 시점으로 바라볼때 더 없이 훌륭한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여튼 각설하고.... 도서관에서 한참동안 읽어보고 싶은 책을 찾았는데, 독립출판 된 서적이 모여있는 곳에서 서성이다 인상적인 사진을 보았다.<작고 오래된 단골집을 가질 권리> 라는 플랜카드를 들고있는 한 여성분의 모습에서 피부로 와닿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나타내고 있음이 느껴졌다.그리고 이 책이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각주:1]' 을 기록한 책임을 알게 되었고 고민없이 집어들었다. 말도 안되는 일들이 계속벌어지고 있는 요즘 따끔한 일침을 주는 글이길 기대하면서.

 

3.기록자 달여리는 사진이나 영상, 글이나 그림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곳곳에서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을 기록했다. 하나의 특정현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시선으로 마주하며 생활영역에서 고민하다 천천히 다가선다. 우리 혹은 우리 이웃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사회적 현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건조하게 기록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그 건조함속에 반복해서 울리는장면의 소리가 있었다.

 

4.

기록은 삶에서 파생된다.

 

반대로 기록으로부터 삶이 지속될 수도 있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록된 것은 그 존재를 드러낸다. 증명한다.

 

기록은 말한다.

있음, 있었음을.

그것은 경험을 뛰어넘는 공유를 가능토록 한다.

 

기억한다면,

기억을 공유한다면,

사건은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P11)

 

5.

“젠트리피케이션은, 공간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에서 일어나고 있다. 노동자는 노동에서 쫓겨나고, 자연은 자연스러움에서

쫓겨난다. 청년은 청년다운 삶을 살 수가 없으며, 인권은 사람에게서 멀어진다. 전기는 필요와 무관하게 과잉 생산되고, 그로 인해 실제의 삶이

쫓겨나거나 위험에 처하고 만다. 정치는 소수만을 위한 작동 기제로 탈바꿈한다. 언론은 세상 일에 관심이 없고, 사람들은 언론에 의심 없다.

너무나 익숙해서 이젠 당연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 그 시대마저 지속된 시간과 이격된다"

(P89-90)

 

 

6.

아무리 아무리 걸어도 비슷비슷한 형태의 길만이 남은, 무한 반복의 거리를 거닌다. 어디가 어딘지 판단이 잘 되지가 않는다. 저기 있는 스타

벅스가 여기에도 있고, 방금 지난 GS25를 금세 또 지난다. 철물점, 미용실, 시장 대신 거대한 이마트가 서 있다. 형형색색의 가게들은 모두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들이다. 회색의 높다란 빌딩들은 저마다 다른 간판을 품고 있지만, 엇 비슷한 검은 유리창의 번뜩임에 제대로 구분을

하기는 힘들다. 번듯한 길. 하지만 좌표를 구분하는 건 오직 도로가에 적힌 지명뿐이다. 어떠한 장소에 서 있든 모두 같은 곳 같다.

점점 햇갈린다. 내가 살아가는 도시가 어딘지,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는다. 똑같이 재단된 공간 안, 나는 그저 하나의 잿빛 부품처럼 돌아가고

돌아갈 따름이다.

 

이제 골목은 없었다.

동네도 없었다.

 

언젠가 색다른 음식점과 다양한 가게들이 잇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구전 동화처럼 전해 듣는다. 그들이 일구어낸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가 한 골목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곤 했다고 한다. 상인들은 저마다 다양한 꿈을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피워나갈 수도 있었다.

손님들도 취향에 따라 가게들을 찾아다니며 즐거운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선택의 권리가 그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입과 입을 타며 골목이 유명해지자, 갑자기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오직 거대 자본을 가진 프랜차이즈뿐이었다. 서로의 이득이 맞물린 건물주와 거대 자본은 금새 한통속이 됐다. 가게를 빼앗고,

돈을 빼앗고, 권리를 빼앗고, 손님마저 빼앗았다. 그렇게 점점 골목을 잠식해갔다. 법은 쫒겨난 자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이미

이름만으로도 유명해진 그 골목에는 그럼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입맛과 취향은 자연스레 새로운 골목의 생태계에 적응해갔다.

소비는 아무런 의식없이 시간이 갈수록 증식해만 갔고, 그 소비의 지불비용은 모두 거대 자본의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악순환이었다.

(P161)

 

7.

힘겹게 책을 읽어내려갔다.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그의 기록은 참담하게 가슴에 묻혔다. 아무도 오지않는 폐허속에서

중얼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곳에 모두가 모여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있었노라고. 마음이 시렵다. 피해갈수도 도와

줄수도 없는 현실만을 마주한다. 누군가에겐 다가오고 있는 '봄'도 차갑게만 느껴질 것이다.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하는 나라, 대한민국.

우리는 알고 있어야겠지. 그 안에 잠식된 모든것들이 우리를 갉아먹고 있음을. 

 

  1.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됨으로써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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